2021년 10월 25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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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
2021. 09.07(화) 14:18확대축소
'사의 찬미'를 마지막으로 부르고 떠난 신여성 윤심덕
1926년 8월 5일 자 주요 일간신문에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는 배에서 당시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 알려져 유명세를 탔던 윤심덕과 전라도 거부의 아들로 신극 운동에 앞장섰던 김우진이 동반 자살했다”는 소식이 보도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자살에는 구구한 억측과 소문, 황색 언론의 이야깃거리 만들기가 뒤따랐다.
김우진이 처자를 둔 유부남이었고 윤심덕이 노처녀였다는 것도 가십성 기사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윤심덕은 평양에서 그리 넉넉지 않은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기독교 신자로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신식 교육을 시켰고 윤심덕의 4남매는 모두 음악에 소질을 발휘했다.
그녀의 여동생 윤성덕은 피아니스트가 되었고 남동생 윤기성은 바리톤 성악가가 되었다.
죽기 전 1926년 7월 윤심덕은 일본 오사카의 닛토레코드회사에서 음반취입을 의뢰받고 일본행을 했다.
레코드 취입을 다 마친 8월 1일 윤심덕은 음반사 사장에게 특별히 한 곡을 더 녹음하고 싶다고 청했다.

그 곡은 요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것으로 ‘사의 찬미’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이하 생략)”

윤심덕과 김우진의 충격적인 동반자살 이후 윤심덕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레코드는 불티나게 팔렸다. 당시로써는 경이적인 숫자 10만 장을 기록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윤심덕이 마지막으로 부른 [사의 찬미]가 노랬말처럼 그녀는 이승을 떠나 홀연히 저승길로 향했던 것이다.
윤심덕과 같은 1920년대 신여성들은 대부분의 한반도 여성들이 혜택받지 못한 고등교육의 혜택과 서구문명을 마음껏 맛보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192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신여성은 나혜석을 필두로 하여 김일엽, 김명순 등의 여성 작가군과 음악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낸 윤심덕이 대표적이다.
이 시대의 신여성들은 시대를 너무 앞서가다 보니 세상이 그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고, 그녀들은 왜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하느냐고 외쳤던 것이다.
이 양극 사이에서 그녀들의 삶은 번민과 고뇌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유봉 기자 env-news@hanmail.net        유봉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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